Fragile | Figment | Filled | Festival 깨지기 쉬운 형상으로 가득 찬 축제
monogar 작가

monogar 작가
깨지기 쉬운 것들이 요란하게 터지는 플래시 앞에 섰다. 무자비한 포착, 같지만 아무것도 깨지지 않았다. 복제와 복제가 만들어낸 사물은 손가락이 꼬여 그걸 떨어트려도 결정적으로 깨진 것은 없을 테다. 복제품은 인지되는 순간 가장 근원의 것을 가리키고 섰다.
원본은 맨 처음에만 있다. 상정하되 상상할 수 없는 바깥에 놓인 처음은 비꼬거나 무시할 수 있어도 없애버릴 수는 없다. 권위. 그것을 부수려는 것 또한 부여받은 사명이다. 이를 노려보는 우리. 또는 동경하는 우리. 출발인 줄 알았는데 도착점이다. 다 온 줄 알았는데 시작점이다. 순서의 문제일까? 시간의 문제일까?
왜곡된 공간 위에 선 우리의 문제다.

황유경 작가

황유경 작가
작품은 작가의 사유와 감각의 집합체로 인지된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 , 그것은 무엇을 가리키고 섰나. 당신은 질문을 먼저 받는가, 답변을 먼저 받는가. 의미, 역할과 관계 없이도 그것은 실존한다. 무엇이 되었든 처음이 될 수도 없고 복제품으로서 스스로를 때려부수지도 못한다. 그러니 이것이 원형일 수밖에 없다고, 모두가 발뺌하는 선언이 둥글게 공간을 떠다닌다.
빠른 변화의 속도와 한없이 가벼운 무릎. 어떤 여정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시작되는 법.
단어로 직조된 옷을 입기 전, 모두가 발뺌하는 선언을 낚아챈다면.
예술이라 명명할 것인가?
예술이 되어라 명할 것인가?

장영준 작가

장영준 작가
그 위에 이 위에 저 위에 생각을 얹는 오버레이. 날선 질문을 시크하게 던지지만 그 질문이 세계에 대한 부정 또는 전복이 되진 않는다. 자신을 둘러싼 현대적 매체를 활용하여 근원을 추적하는 시간은 매체 안에 풍덩 빠져 흐른다. 그리고 외부를 둘러싼 환경은 이내 내부적 요인이 된다. 취향은 이 우주에서 나왔다.
그래서일까. 알록달록한 현장은 정갈하다.
김나연 작가

김나연 작가
인체 중 가장 정교하고 섬세한 부위인 손이 발전과 함께 일그러진다. 마치 꿈처럼 여기와 동일한 여집합에서 손가락을 까딱까딱, 원형으로서의 나를 깨운다. 여전히 내 것이라 할 신체가 왜곡되지 않았으므로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인가. 이 연명이 하나의 시대적 위로가 될 것인가. 왜곡이 아닌 종말에서 위로를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정교함이 오류를 만든다. 복제와 오류와 암과 사과와 폐기. 우리는 이제 가장 정밀한 기관을 아웃소싱한다. 나도 모르는 것을 우리에게 맡긴다. 이 무책임함을 서로에게 사과하고 다같이 반성한다. 가능한 것은 가능하다. 나의 뇌는 우리의 뇌다. 인류가 일궈낸 지성은 모두 사회적이다.
종말이 먼저 있어 창조를 꿈꿨다고 생각해본다. 우리는 출생했지만 누구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그러한 선언. 보이는 그대로 예쁘고 음흉한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명명될 것이다. 그것은 크나큰 행운이자 동시에 불행이다.
2025.2.
김여준 @kimyo_j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