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준
왼쪽, 270도, 외부, 멀리, 위로… 방향과 원근을 비롯한 공간 설정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공간을 인식할 때, ‘나’는 이미 기준으로 거기에 있다. 구획된 캔버스 앞에 선 관람자는 전시장 공간 내에서 그리고 작품 앞에서 자연히 기준이 된 자신을 발견한다. 
특정 공간을 연상시키는 이 선들은 이전에 보았던 무엇일까, 그로부터 파생된 보편적 특성일까? 내가 보는 이 선들을 존재하는 풍경을 재현한, 외부의 것으로 봐야할까, 그로부터  발견된 내재적 특성으로 봐야할까? ‘내재적 공간’에 대한 물음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우린 지금 어디에 서 있나? 틀 위에? 틀 안에? 
틀은 무자비하게 확장되지 않는다. 캔버스의 틀은 바깥 테두리로부터 안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부로부터 바깥을 향하여 형성된다. 중심에는 내가 섰다. 틀을 부수는 것은 바깥으로부터의 작용이다. 틀은 딱 그러해야할 만큼, 필요만큼 확장하여 만들어진 당위의 형태다.
선으로 구획된 그림으로부터 출발하여 저 멀리 있는 특정 도시에 뚝 떨어지든 새로운 공간에 들든, 당도하는 곳은 결국 그곳을 그리는 ‘나’이다. 관람자가 떠올린 바 즉, 지금 관람객 내면이 바로 이곳이다. ​​​​​​​
그렇다면 작품은 관람객을 초과하지 않는 감상만을 가능케 하는 것일까? 그렇다. 다만 내재한 것들을 발견하는 것은 ‘단지 그만큼’이 아니다. 작품은 파고들어 퍼진다. 우주에 내재한 우리는 우주라는 거시의 세계에서도, 나라는 미시의 세계에서도 그 스케일을 혼동하며 정신없이 길을 잃곤 한다. 알다시피 자신 안에서 특히 더 자주 그렇다. 
인정할 것들이 있다. 1) 작품은 내가 알고 보는 만큼을 초과할 수 없다. 2) 나는 내재하였거나 내재해 있다. 3) 그리고 나는 나를 모른다. 
2025.03. 
김여준 @kimyo_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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