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디선가/어디서나 품었던 그림과 말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다. 사적인 지각과 인식이 공적 공간을 점유하면서 작품을 넘어 작가로, 작가를 넘어 인간으로, 인간을 넘어 본연으로 그 형태와 감각을 흘려보낸다.
그렇게 만난 우리가 잃어버린 일부를 찾은 듯 서로 꼭 들어맞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 그보다는 어긋날 것이다. 누군가의 울퉁불퉁한 내면의 조각들은 공감될 수는 있어도 나의 것이 될 수 없고, 그렇다고 완연히 낯설 수도 없다.

작품이 곧 하나의 세계라면, 거대한 책을 자처하는 이곳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원한 타자인 작가와 작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다. 누군가 펼쳐놓은 일기장을 우연히 보게 된 듯한 감각. 그처럼 내밀하지 않더라도 버스 대각선 자리에 앉은 타인의 핸드폰 화면 속 릴스의 무의미한 반복조차 ‘그의 것’임을. 이 거대한 책 읽기는 ‘공인된 관람’을 전제로 한, 말 그대로 전시이자 쇼다.
개인의 일시적인 감상과 인상이 작품과 전시로서 어떤 가치를 지닐까? 인류가 가닿은 보편적 진리도 헤아릴 수 없는 개인을 향한 개별적 관찰로부터 나온다. 내면에서 요동하는 응어리들을 어떻게 얼마나 드러낼 것인지의 선택이 다시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여 성립시킬 뿐.


작가는 벽의 한 면을 가득 채운 글을 관객이 정독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작가는 이해 받기 위해 말하지 않는다. 새벽 두 시의 혼잣말처럼, 오후 두 시,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답장처럼 들려주기보다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말과 장면으로 ‘있을’ 뿐이다. 설명되지 않을 문장, 영원히 닫히지 않을 장면들은 불완전하기에 이를 마주한 타인, 관객과 접속을 일으킨다. 예상에 반하여 모든 문장과 획을 곱씹어 읽어낸다면 어떨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서로에게 스친 이상 발을 들인 것일 테다.



그림을 휘황히 비추기를 거부하듯 옆에서 빗겨치며 단면 위 울퉁불퉁한 선을 드러내는 조명. 그조차도 없이 왜곡되어 벽을 훑는 프로젝터 안에 놓인 작품. 완결된 무엇이기를 포기한 회화와 글은 그 자체로 불안정한 내면을 드러낸다. 작품들은 커튼콜의 갈채를 바라지 않듯 화이트 큐브 안을 미묘히 어긋난다. 불완전한 상태로 수단이 되고 적극적으로 무드가 되어 전시장 안에 존재한다.
감상 중 관객은 주변을 무시할 수 없다. 들려오는 앰비언트의 사운드를 무시할 수 없고, 소음으로 인지되며 프로젝터 빛 사이를 떠도는 먼지를 무시할 수 없다. 어항 속 뿌연 문장과 함께 떠다니는 먼지를 마주할 밖에는 없다. 욕을 불러일으키는, 스치는 순간 역동을 일으키는 각각의 사정, 이해받기 위한 몸부림과 그를 떨쳐내고자 다시 더 큰 반작용의 몸부림. 이 춤들은 멀끔하지도 시니컬하지도 못한 채 비명과 먼지를 날린다.

이 모두는 죄다 무슨 연관이 있는가? 어떤 가치를 지니며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 것인가. 각기 다른 것들은 부서질 듯 약한 연결체를 생성한다.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본 적 없는 뒤통수를, 습관적인 하품을, 스친 냄새를, 살짝 춥던 온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2시라는 점 위에서 만났을 뿐, 그 위를 떠도는 불완전한 기억의 인물들일 뿐. 그러나 서로의 좌표 위 어느 2시, 우리는 환영에 가까운 연결과 삐딱한 사선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작은 탄식. 비로소 타인의 어항 속에서 숨 쉬는 법을 깨닫는다.


2025.04.
오브오브젝트 @ofob_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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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연 개인전
《2시: 어항 속 문장들》
2025.5.30(금) - 6.12(목)
바움아트스페이스 ✖️ 오브오브젝트
오브오브젝트 구성원들이 바움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는 전시에 관하여 글을 씁니다. 종종 전시장이나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만 전시를 즐겨 보는 것과 일상적으로 예술을 감각하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오브오브젝트는 전시 공간을 운영하면서, 감상자보다는 조금 더 가까이 작품과 공유한 시간과 이야기를 전합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오랜 시간'을 넘어 지그시 바라보고, 그렇게 작품 너머 더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