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준, 조영아
4월 3일, 이번 <성북동 친구들> 전시의 더보기에서는 작품과 작가들 한자리에 모이게 된 계기, ‘추모’에 의미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함께 경유지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임승오 작
임승오 작
이훈 작
이훈 작

(왼쪽부터 세 작품) 이현숙 작, (오른쪽) 김철우 작

"성북동에서 자주 어울리곤 했던 이들이 먼저 간 2명의 친구(김철우, 임승오)를 기억하며 함께 전시를 엽니다."
미술에서 작가에 대한 작품의 추모는 보다 감각적이다. 떠난 작가의 미술 작품은 물리적으로 남는다. 글 또한 글자가 물리적으로 남지만 글자 자체는 작품에 가닿기 위해 범용되는 포트일 뿐 그 대상이라 하기 어렵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글자 너머에 그려지는 정신 세계. 그런 점에서 글과 미술작품은 누군가를 추억하는 방식이 미묘하게 다르다. 미술 작품을 보고, 그것을 향해 손을 뻗을 때 우리가 함께 있음을 지나간 시간을 아울러 감각하게 된다.
한편 형태가 남아 있다는 것은 존재를 선명하게 드러내지만, 동시에 더 큰 부재를 실감하게도 만든다. 유품, 목소리, 사진 같은 감각적인 흔적들은 그것이 기인한 실재가 부재함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여전한 것과 부재한 것 사이를 끊임없이 진동하며 오가게 한다. 그 사이에 남겨진 자그마한 것들 하나하나를 길어올리는 것. 그런 와중에 느끼는 무뎌지지 않는 감각들. 그것이 생경하여 물리적으로 우리는 모였나보다. 여기.
각각의 기억이 거울 조각이 되어 하나의 상을 완성한다. 그리고 다시 빈 자리 너머의 공간을 비추듯 깨어진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부재에 응답한다. 애도를 넘어, 애도를 통해 떠난 이의 숨결 위에 얹어진 여러 겹의 숨결들이 겹쳐지는 모습을 이번 전시를 통해 본다.
날선 감각은 연명과 생존을 돕는다. 그리고 망각 또한 생존, 현존을 뒷받침한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무수히 잦은 자리이동을 하며 우리는 잊을 수 있고, 또한 누구든 잊혀질 권리를 지닌다. 그럼에도 존재 위에 얹혀지는 망각을 어른이 될수록 무거워지는 어깨 위 책임감처럼 여겨본다. 나와 타인의 상실, 애도가 엉켜든 실뭉치를 한땀한땀 짚어나가며.
여기에서 생각한다. 감각적인 물체를 남기지 않고 떠난 존재들에 대하여. 그들의 빈 자리를 우리는 어떻게 감각할 수 있을까? 기억으로 감각할 수 없는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 있는 이들에게 남겨질 수 있을까? 존재의 부재는 기억의 부재와 오롯이 일치하는가? 물리적인 접촉 없이도, 맞대어진 기억 없이도 발견되길 기다리는 어느 존재. 기억은 초월적인 동시에 한정적이다. 공이 아닌 부재는 우리에게 한계를 넘어선 상상을 허용하고 요청한다.
4월 3일에 읽고 있던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133p)”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 간의 연결을 감각하기 위해 작품 속에서는 무수한 중첩의 상태가 그려진다. 정반대로 보이는, 맞물릴 수 없다고 여겨지는 그것과 이것이 실은 다르리란 법이 없다.
작품은 연결을 시간적 제약을 넘어, 나라는 한계를 넘어, 상상의 범위를 넓혀서 그려낸다. 그리고 그것은 애써 잊혀진, 존재했다고 여겨지지 않는,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존재에 대한 추모와 애도 역시 가능하게 만든다. 어느 빈자리를 향해 깨진 거울 조각을 비춰본다. 빛이 지나치고 부딪히는 어느 자리, 거기 놓인 부재. 이 자리에서 그곳을 향해 손을 뻗는다.
떠난 당신을 향한 추모가 다른 더 많은 이를 향한 애도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지구 안에서 물은 무한히 순환하니까, 그들과 당신에게 닿았던 눈이 내 손에 묻은 눈과 같지 않으리란 법이 없으니까, 우리는 모두 함께 이곳에 있으니까, 내가 당신이 아니란 법이 없으니까. 여한없이 당신을 그리워하는 4월이다.
2025.04. 
김여준 @kimyo_jun
조영아 @aroz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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