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
첫번째를 생각한다. 처음으로 받은 선물을.
어릴 적 내게는 많은 장난감이 있었다. 외가의 맏딸인데다 여수같은 꼬맹이였던 내게 어른들은 사정이 허락하는 한 많은 장난감을 선물했다. 일찍 친아빠를 여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들을 부추겼을 것이다. 어쨌든 내게 수많은 장난감이 있었는데, 주로 당시 유행하던 마법소녀의 요술봉이 아니면 공주 인형이었다. 나는 동물인형도 아기인형도 좋아하지 않고 오로지 공주님 인형만 좋아했었다. 삐죽삐죽한 머리카락과 얼룩덜룩한 화장을 한 친구들의 인형과는 달리 긴 머리도 깨끗한 얼굴도 모두 그대로였다. 어릴 적에도 내 유난한 성격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나는 크리넥스로 그들에게 치렁치렁하고 화려한 드레스를 만들어 입혔었다.
그때 내가 가진 유일한 아기 모양 인형은, 아주 부드러운 면으로 만들어진 귀여운 잠옷을 입은 인형이었다. 뒤쪽의 손잡이를 돌리면 안에 있는 오르골에서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악이 나오며 아기는 고개를 이쪽 저쪽으로 돌려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잘 만든 인형이었다.
여섯살 쯤의 나는 그 아기인형을 잘 가지고 놀지도 않으면서, 문득 그에게 갑작스레 화가 치밀고는 했다. 그것은 질투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생이 내게 선사한 다채로운 고통을 가지지 않은, 평온한 얼굴로 잠든 인형에게 미운 마음이 참을 수 없이 치솟아 그를 마구 때려주고는 했다. 팔다리와 얼굴을 당기고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말을 속삭이고는 했다. 그러고 나면 지독한 죄책감과 슬픔이 찾아왔다. 나는 아기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훌쩍거렸다. 그렇다고 그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느낀 죄책감과 슬픔은 정말이었다. 다른 모든 어린이처럼 나 역시 지독히 착하고 물렁물렁하고 상냥한 영혼을 가진 어린이였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아주 조용조용히, 나의 작은 방 안에서 처리했었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은 내게 부드러운 인형의 감촉과 오르골의 소리, 그리고 어쩐지 저릿한 쇠 냄새를 불러 일으킨다.
여기에 여러 모습을 한 인형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무대 위에서 활동하는 배우 인형들이고, 지금은 한가한 시기에 잠깐의 외출을 감행하였다. 바움아트스페이스의 서늘한 공간에서 자신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함께 보며, 서로에게 기대어 있다. 전우들이 그렇게 하듯이. 이 조용한 피크닉에서 인형들은 그들이 맡은 역할과 그들에게 담겨졌던 수많은 얼굴을 잠시 뒤로 하고- 그들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
나도 인형극을 본 적이 있다. 공주님 인형이나 종이를 오려 만든 인형으로, 혹은 그 작은 아기 인형으로 직접 상연한 인형극을 제외하고서라도.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찰랑거리는 얇은 천을 배경으로 하여 오래된 이야기들을 작은 인형극으로 보여주고는 했었다. 커가며 연극을 업으로 삼게 되었을 때도 물론 인형극을 보았다. 무대 위로 인형이 등장하면- 관객들은 어둠 속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무장을 해제한다. 무대 위로 빨려들어가는 우리들의 작은 얼굴. 인형의 얼굴은 사람 배우들보다 더 빠르게 우리들의 얼굴을 담아낸다. 우리는 표정 없는 그들의 얼굴에 표정을 불어넣고 그들의 몸짓에서 떨림을 느낀다. 우리는 그들에게 얼굴을 내어주고, 그들은 받아들인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받은 첫번째 선물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는 영혼이 있다.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와 소비주의, 물질만능주의가 장악한 세상 속에서 쉬이 잊혀지는 그것. 우리가 처음으로 받은 선물.
인형들은 아무런 불평도 없이 우리들의 영혼을 자신의 얼굴에 담고- 무대 위에서 이야기한다. 우리의 슬픔을, 기쁨을, 고독과 연결을, 삶을,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을 대신 노래한다. 덧입혀지는 얼굴들. 내 옆에, 내 위에, 내 앞에 놓여진 얼굴들. 그 때서야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도 영혼이 현존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막이 내리고 조용히- 그들의 시간에. 인형들은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은 채 다시 자리로 돌아간다.
이 조용한 피크닉 안에서, 인형들은 기억할 것이다. 자신들이 밟았던 무대와 마주했던 얼굴들을. 한숨도 눈물도 웃음도 없이 그저 조용히 되새길 것이다. 그 순간 그들 역시 얼굴을 가진다.
2025.04. 
이라 @ila_ag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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